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옹진반도 전투 (문단 편집) === 사곶항 철수 === 제2대대가 오후 2시까지 일시적으로 제1대대의 주방어선을 일부 회복했을 때 제17보병연대로부터 제1대대 지역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연대본부가 오전 12시에 강령으로 철수했으니 제2대대도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자신이 담당한 지역의 상황만 제한적으로 알고 있으며 옹진반도의 전체 전황에 대해서 몰랐던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은 철수를 독자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각 중대에 연대본부의 철수명령을 전달한데다가 연대본부와 지원부대들이 원래 주둔지에서 철수한 상황을 확인한 직후 제1대대를 통합 지휘하여 냉정리 부근의 불당산으로 철수하였다. 갑자기 내린 철수명령 때문에 제2대대도 분산철수하는 상황이 되었다. 제7중대는 오후 1시에 첫번째 목표인 사동을 확보한 후 다음 목표인 은동으로 진출해서 제1대대의 저항선을 회복하기 직전 상황까지 왔다. 그러나 철수명령을 받고 후퇴중에 제3소대장 조유동 중위와 소대선임하사 고용출 중사가 전사하는 바람에 지휘관을 잃고 부대가 뿔뿔히 흩어져서 제1소대와 제3소대는 비행장이 있는 냉정리로 철수했다. 제5중대도 상황은 마찬가지라서 초기 철수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이미 북한군이 깊숙히 침투한 상황이었고 철수 중 차량을 세우라는 주민의 신호를 무시하고 도로를 달리다가 보리밭에 매복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서 5중대장인 김교석 중위등 5명이 전사한다. 그래서 5중대도 분산철수해서 비행장이 있는 냉정리로 갔다. 대대본부도 무사하지 않아서 오후 3시에 마현으로 이동하던 제2대대장 송호림 소령도 매복한 북한군의 총격을 받았으나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냉정리 남쪽에서 철수병력과 다시 만났다. 이 때의 병력은 낙오병력을 수습한 것까지 합쳐서 400여 명의 병력으로 불당산에서 재편성을 실시하였다. 기록상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반격을 잘 수행하던 제2대대가 '''철수명령 받았다고 급속하게 붕괴'''되는 것에는 북한군의 반격이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점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북한군의 38경비 제3여단의 일부 부대는 격퇴했지만 다른 부대가 우회해서 매복한 것에 당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원래 철수계획상에는 옹진과 강령을 거쳐서 부포항으로 철수하게 되어 있었으나 이미 옹진에 북한군의 선발대가 진출한 상황을 확인한 후 사곶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제2대대장이 연근산 부근에 이르렀을 때 연대 정훈관인 한서한 중위로부터 “제1대대를 통합 지휘하여 사곶항으로 철수하라”는 연대장의 본격적인 철수명령을 뒤늦게 받았다. 이는 송호림 소령이 1950년 4월에 제2대대장으로 배치변경 되기 전까지 제1대대장을 하고 있었기에 혼란속에 뒤섞인 제1대대와 제2대대 병력을 통합지휘하기에 적합한 인물이기도 했다. 해당 시점에서 제1대대, 제2대대, 다른 부대의 낙오병등의 병력이 뒤섞였으므로 임시로 재편을 실시했다. 1개 분대를 5명으로 하고 3개 분대를 1개 소대로 하며 5개 소대를 1개 중대로 해서 총 7개 중대로 병력을 재편하였다. 오후 7시 30분에 연근산에서 다시 300여 명의 낙오병력을 수습한 제2대대는 6월 25일 오후 9시에 제7중대와 제4중대의 박격포소대를 연근산에 잔류시켜서 후위를 엄호하게 한 후 철수를 개시하여 2시간 후에 사곶항에 도착하였다. 사곶항에 도착했을 때는 낙오병이 계속 몰려들어 1,300여명이 되었고 경찰과 일반주민을 합쳐 해상철수 대상인원이 2,000여명이나 되었으나 선박을 구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사곶항 철수는 원래 계획상에 없는 터라''' 다른곳에서 선박이 올 턱이 없었고 온다고 해도 부포항으로 가게 된 상황이었다. 이 때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북한군이 얼마 후에는 사곶항으로 밀려올 것은 분명한데다가 사곶항 주변에는 방어진지로 쓸만한 곳도 없었다. 제1대대와 제2대대는 그냥 보병대대로 중화기도 별로 보유하지 않은 상황인데다가 다수의 낙오병까지 합쳐져서 조직적인 전투가 힘들었고 개인화기와 휴대한 탄약만으로 버텨야 하므로 장시간의 전투도 곤란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사곶항을 빨리 떠나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2대대장은 오후 11시에 서장대행을 담당한 김선진 경감으로부터 대대장이 나서서 용호도에 있는 선박을 철수 지원에 투입하라 압박할 것을 제안받았다. 그래서 연락끝에 사곶항 맞은편에 있는 용호도의 지서주임 김두의 경사의 주선으로 대성호라고 부르는 20톤급 기관선을 지원받았다. 이 선박으로 6월 26일날 아침까지 군인과 경찰을 용호도로 수송하였다. 정원 90명짜리 소형 선박으로 안전을 위해 80명씩 탑승해서 필사적으로 실어 나른 끝에 군인과 경찰의 철수는 거의 완료되었다. 6월 26일 오전 7시에 후위를 담당한 제1중대가 탑승하기 시작하고 민간인 수송에도 착수하였으나 시작하자마자 사곶항 부근에 북한군의 [[박격포]]가 발사하는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그 강도도 점점 심해지는지라 하는 수 없이 민간인 5백명을 남겨둔 채로 수송작전을 중단하게 되었다. 여기서 비극적인 일도 발생했다. '''사곶항쪽으로 [[대한민국 해군]]의 LST 1척이 제17보병연대장의 요청에 따라 혹시나 [[피난민]]이라도 있을 것 같아서 6월 26일 오후 2시경에 접근하였으나 북한군 선박으로 오인한 [[대한민국 육군]]이 신호를 보내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LST는 이미 사곶항 주변이 모두 북한군에게 점령된 줄 알고 떠나버렸고 결과적으로 용호도등 주변 섬으로 대피한 민간인들도 스스로 선박을 구하지 않는 한 완전한 철수를 제대로 못한 것이다. 용호도는 원래 어업의 중심지중 하나였고 [[인천해양과학고등학교]]의 전신이자 1926년에 개교한 용호도공립수산보습학교가 존재했으므로 이용 가능한 선박들이 있었다. 그래서 용호도에서 다시 20톤급 동력선을 비롯한 대형 화물선 6척을 획득한 제2대대는 6월 26일 오후 7시에 부포 앞바다에서 제3대대 병사 10명이 탄 선박을 만나서 부포항이 이미 함락된 것을 안 후에 방향을 돌려서 6월 27일 오전 7시에 [[연평도]]에 도착했다. 그 이후에는 6월 27일 오후 8시에 연평도를 출발해서 6월 29일에는 [[군산]]에 상륙하여 [[대전]]에서 본대와 합류하게 되었다. 사곶항 철수는 계획에 없던 것을 감안해본다면 매우 훌륭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민간인을 어쩔 수 없이 철수시키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